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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차 / 앞으로 나아갔다•계속될거라고

Muerte 2017. 10. 14. 21:10
 문득 깨닫고 보니 이미 한참을 걷고 걸어 내가 얼마나 왔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린 채였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남은 길을 보려 고개를 들어보았지만, 지나온 길을 돌아보려 고개를 틀었지만, 앞뒤 할 것 없이 빛 한 점 들지 않은 채 내가 서 있는 딱 그 좁은 공간만큼만 보이는 어두운 곳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노려보고 있어도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길이기는 한지조차도.

 그걸 깨닫고 나자 지금까지 걸어왔던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얼어붙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발목부터 차근하게 잡으며 기어 올라와 목 끝까지 그 서늘한 손끝을 얹어내서 잠시 숨을 참았다가 길게 내쉬었다. 앞도 뒤도 내가 서 있는 곳조차 모르는 지금 내가 이 길을 계속해서 가야할까 머릿속이 어지럽게 이지러지고 생각이 뭉개지며 사고를 짓눌러댔다.

 이어지고, 뭉개지고, 끊어지고, 억지로 끌어와 붙여서, 사고라도 멈추면 이대로 주저앉아 버릴까 억지로억지로 이어낸 사고는 결국 ‘왜 나는 여기서 걷고 있을까?’라고 마음이라는 호수에 툭하니 돌을 던졌다. 안 그래도 술렁이며 어지럽던 마음이지만 그 작은 돌의 파문은 생각보다 깊고 짙어서 금세 호수를 뒤엎던 흐름이 사라지고 고인 그대로 파문을 따라만 작게 일렁여댔다.

 왜 나는 지금, 걷고 있었을까.

 답은 없었다.

 다만 뭐든 해야 겠으니까. 갈 길조차 모르겠지만 걷는 것만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나 의미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이유 따위는 뱉어낼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나 아무것도 아니고, 의미 없는...

 의미가 없다면, 나는 어째서 이걸 지금까지, 이렇게 그나마 보이던 길마저 잃을 때까지, 스스로 있는 곳조차 모르고, 결국 무서워져서 발을 멈추고 덜덜 떨게 될 때까지 멈추지 않은 걸까.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이제는 공포인지 다른 무엇인지 모를 떨림을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온 것의 의미를 찾기 위해 사고를 이었다. 같은 단어, 의문, 그것만으로 점철된 사고의 흐름.

 이번에도 답은 없었다. 심지어 그냥이라는 이유도 없었다.

 그럼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문득 억울해지고, 화가 나려고 해서 주먹을 꽉 쥔 손을 내려다보고, 여전히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있는 다리를 내려다 봤다.

 까닭 없는 억울함, 이유모를 탈력감, 아득한 황망함. 마음이 다시 수런해지려는 것에 고개를 들어 다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앞을 봤다.

 나는 이미 이런 길을 한참을 걸어왔다. 그건 왜였을까. 어째서 나는 걸어왔나. 고개를 들지 않았다는 것만이 아니다. 이런 줄 몰랐다는 것만이 아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힘들고 다리가 아팠던 적은 있다. 지금처럼 무섭고 불안하다는 걸 깨닫지는 못했어도 이런 길인걸, 잠시라도 멈추어버리면 깨달아버리는 이 길 위를 나는 어떻게 지금까지 쭉, 계속, 걸어올 수 있었나. 어째서 그렇게 걸어왔나.

 그걸 생각하자 다리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조금 뻣뻣하게, 아까까지와는 달리 소극적이지만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한 걸음 앞과 한 걸음 뒤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위를 두고도 조금씩, 조금씩 다시 걸을 수 있었다. 그것은 묘한 느낌, 묘한 감정이었다. 어째서 나는 지금 이렇게 걸을 수 있을까. 왜일까. 답이 돌아오지 않는 물음을 계속해서 호수에 던져댔다. 호수 위에 파문을 그리며 느릿하지만 출렁이는 그것에 걸음이 잔잔하게 안정되어 앞으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출렁이던 호수의 아래, 바닥에 닿은 돌들이 쌓이고 쌓였다. 그리 얕지 않을 텐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렇게나 오래 던졌던 건가, 아니면 나는 이걸 생각하기도 더 전부터,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이런 돌을 던지고 있었던 걸까.

 무섭고, 불안하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도, 지금 내가 서 있는 길도, 앞으로 펼쳐진 길도, 또 어쩌면 있었을지 모를 내가 그곳으로 가지 않았음을 후회하는 길도, 그 전부를,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계속 앞으로 걸어갈 수 있는 것은,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며 호수 아래에 돌을 던져 결국 호수 위에서 보이도록 쌓아올린 그 답은, 원하던 것에 비하면 너무 한심하고, 고민하던 것이 우스울 정도로 심플해서 푸흐흐, 혼자 걸으며 그렇게 바람 새는 소리로 웃어버렸다. 한심하게도.

 걷고 있는 이 길이 계속 되고 있으니까. 적어도 지금은, 막힘없이. 계속 될 거라고 알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