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깨닫고 보니 이미 한참을 걷고 걸어 내가 얼마나 왔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린 채였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남은 길을 보려 고개를 들어보았지만, 지나온 길을 돌아보려 고개를 틀었지만, 앞뒤 할 것 없이 빛 한 점 들지 않은 채 내가 서 있는 딱 그 좁은 공간만큼만 보이는 어두운 곳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노려보고 있어도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길이기는 한지조차도. 그걸 깨닫고 나자 지금까지 걸어왔던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얼어붙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발목부터 차근하게 잡으며 기어 올라와 목 끝까지 그 서늘한 손끝을 얹어내서 잠시 숨을 참았다가 길게 내쉬었다. 앞도 뒤도 내가 서 있는 곳조차 모르는 지금 내가 이 길을 계속해서 가야할까 머..
비가 내린다. 새벽의 문을 가리던 구름이 아침 점심의 하늘을 느릿하게 돌아다니더니 결국 자리를 펴고 앉아 슬슬 눈물을 떨구다 이제는 오열하며 울부짖노라 굵은 눈물방울, 빗방울을 쏟아내고 있었다. 진짜 그만해주면 좋겠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창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사나웠다. 탁탁탁도 아니고 텅텅거리는 소리가 적막하게 커피향을 품어내는 실내에 번졌다. 참다못한 객이 일어나 커튼을 쳐버렸지만 얇은 천조각은 유리를 두드리는 울음을 조금도 막지 못했다. 방에라도 들어가 있을래? 물어도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시끄러운 것도 싫어하면서 고집은. 혀를 내두르고 정리를 마친 자리에서 손을 씻었다. 수건이 없네. 치워뒀던가. 귀찮아서 대충 키친타월을 뜯어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닦으며 불을 껐다. 거실 소파에 베란다 창..
짙은 어둠을 꿈꿨다. 밑도 끝도 없는 어둠 속에, 그 심연보다 더한 바닥까지 추락하고 있는 나를 꿈꿨다. 떨어지고 있다는 것보다, 그 어둠보다, 끝이 없다는 그것이 꿈 속의 내 정신줄을 살라먹으며 차라리 몸이 터져 죽어도 좋으니 어서 바닥에 닿아라고 간절히 원했다. 끝없이 떨어지고 떨어지는 감각. 꿈이라는게 거짓말처럼 선명하고 날카로운 낙하감이온 몸을 감싸안았고, 차가운 바람이 억압하듯 귓가를 스쳤다. 언제 갑자기 바닥에 닿을 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마치 축척되듯 켜켜이 쌓아올려져서 머릿속을 어지럽게 뒤흔들었다. 그만. 그만. 그만. 그만. 그만.그만.그만.그만.그만그만그만그만그만그만------ 제발 그만. 차라리 이제 죽여줘. 나오지 않는 비명이 목구멍을 긁어 피보다 붉은 소리를 흩뿌렸다. 정적의 소리...